Kirin [Space Anthem] (2009, Salon 01/Sunz)

 

깜깜한 조명. 들어오는 입구에는 묘한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아무튼 깜깜한 곳에 들어왔다. 약간은 차가운 에어콘 바람이 목

뒤를 춥게 만든다. 옆에는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고.. 에어콘 바람 냄새와 약간의 향수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아무도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왜 못피우게 했으니까. 마침 감기에 걸려서 감기약을 하나 먹고 와서 그런지 약간 졸린 듯한 느낌

도 든다. 어쨌든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 근데 진짜 왜 이렇게 깜깜한지.. 내 손엔 입구에서 나눠준 얄싸한 종이 팜플렛이

쥐어져 있었고 내 야광 손목시계는 오후 7시가 막 지났음을 가리킨다. 이윽고, 쮸이우이이이잉~~~ 고의적으로 그런 건지 귀를

자극하는 키보드 전자음이 그 어두운 공간에 울리기 시작했고 어스름한 노을과 같은 조명이 켜진 스테이지 위에는 모자를 눌러쓴

청년이 연주를 시작했다.

 

살롱01 소속의 화가이자 뮤지션인 기린의 데뷔작이자 테마 앨범인 본작은 위에 묘사한 분위기를 물씬 내준다. 뭐랄까.. 분명

'일렉트로니카'라는 망할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겠다만 그 느낌을 자세히 좀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마치 90년대 한참 국내에

테크노 씨디들이 막 수입되던 무렵의.. 프라디지보다 켄 이시이랑 제프 밀즈가 짱이지 하면서 퓨쳐아이트로니카같은 원맨 밴드가

나오던 시절의.. 느낌을 준다고 할까? 오로지 키보드 한 대로만 작업한 듯한, 고의적으로 강조된 키보드 전자음을 전면으로 내세워

오히려 둔탁하지 않은 비트들은 부차적으로만 들린다. 앰비언트라기 보단 살짝 테크노를 기본으로 하면서 거기에 약간의 서사적
이고 장난스런 느낌과 힙합에서 주로 쓰이는 샘플링과 스킷의 장치들을 살짝 첨가한 듯한 느낌? 뭐 그 중간 어디메쯤에 해당하는

음악을 들려준다. (같은 크루 소속인 후랙탈의 영향이 완전히 안미쳤다고는 할 수 없겠다.)

 

앨범 초반부에는 다소 진부하다고 생각되는, 덥의 영향이 느껴지는 폴리리듬에 우주적인 느낌을 살린 전형적인 '테크노'를 들려

주다가 Interlude 이후부터 제대로 그 만의 개성이 느껴지는데 앞서 얘기했듯 비트보다 오히려 '키보드 전자음'을 과장되게 전면

으로 내세운 "오늘밤은 나 너와 함께 있고 싶어"나 "Jacky Swing Lover" 등에서 키보드 건반을 이용한 그 만의 탁월한 감각이
느껴진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오토튠이 아닌 보코더를 이용한 듯한 보컬이 가미된 "오늘밤은.."이나 "Space Anthem (Instru-

mental)"과 같은 트랙은 분명 그의 음악을 기대한 팬들에게 어필할 만한 멋진 팝 트랙이다. 나의 경우 앨범을 듣다보면 이상한

징크스가 있는데 '그 앨범의 타이틀과 같은 이름의 트랙'은 나한테는 거의 항상 좋았다는 거. 이 앨범도 마찬가지로 동명 타이틀

트랙인 "Space Anthem (Instrumental)"이 제일 마음에 들고 "Honey Seoul"에서의 외국인들의 대화도 매우 귀엽다. '음악의

회화성'이 아마도 이 앨범의 가장 중요한 테마이지 싶은데 대체적으로 곡제목을 보고 그런가부다.. 상상하면서 들으면 제법 그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 중 특히나 보너스 트랙으로 있는 "카레먹는 모습"을 들으면 정말 노란 카레 위에 사각형의 감자와

당근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떠올라 집에 오자마자 B29 한봉을 비우게 만들었고, 장장 6여분에 달하는 마지막 트랙 "우주여행"을

들어보면 이 기린이라는 뮤지션의 감각이 '단순 테크노 전자 음악 비트 장난'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그렇게 대충 만든 앨범

아니다 이건. 딱 기대했던 만큼 뽑아준 듯 하다. 힙합이랑은 전혀 관계없는 음악이니 주의하기 바란다. 애니웨이 살롱에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