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nikut's Cultural Parad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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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Lynch [INLAND EMPIRE] (2006)

tunikut 2008. 12. 19. 13:18

 

어떤 특정한 문화적 성향 - 내가 좋아하는 성향이라고 봐도 좋다 - 을 A라고 정의하자. 그리고 그와는 대조되는 문화적 성향을 B라고

하자. 그 자신을 특징지워주는 A라는 성향을 가진 어떤 아티스트가 - 영화감독이든, 뮤지션이든 화가든 - 새로운 작품에서 AA를 들고

나오게 되면 A를 좋아하던 대부분의 팬들은 이거 좀 심했다 정도로 느낄지언정 적어도 실망은 하지 않는 걸 알 수 있다. 반대로 그

아티스트가 B를 가지고 나오면 그의 팬들은 대다수 실망한다. 

 

그런 점에서 데이빗 린치 감독의 신작 "ENLAND EMPIRE"는 지독할 만큼의 AA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과연 내 블로그의 이 카테고리

에 올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잠시 고민한 이유가 바로 난 더도덜도 아닌 린치 감독의 A를 좋아했는데 AA를 접하고 나니 기분이 멍해

졌기 때문이다. 단 맛을 좋아하는 사람한테 지독하게 단 맛을 선사하면 충격을 입는 느낌이랄까.. 그래, 이 영화에 비하면 "로스트 하이

웨이"는 너무 논리적인 영화였고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너무 친절한 영화였다. 오히려 "이레이져헤드"는 귀여울 지경이다.  

 

린치의 영화를 좋아해서 나처럼 "그 분이 오셨어요!"의 느낌을 받은 이들이라면, 솔직히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의 이 영화가 만만치

는 않지만 어차피 린치 감독의 팬들은 대다수 그의 내러티브보다는 이미지와 비논리적인 플롯을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영화 역시

좋아하게 될 것 같다. 난 항상 린치의 영화를 보면 내 나름의 논리를 갖고 어느 정도는 해석에 도달하는 편인데 - 그런 점에서 어떻게

보면 난 '린치가 권장하는 모범 관객'에 가까울 수도 있다 - 그의 영화는 대부분 (1)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개인적 혹은 대인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 상황 (주로 욕망, 배우자의 외도 등)을 기본 테마로 깔고 (2) 핵심 인물과 관련된 내러티브 - 그게 진짜 현실이든 환상이든

꿈이든 과거든 미래든 영화 속의 장면이든 - 하나 정도는 어느 정도 관객에게 친절하게 이해시켜주고 있으며 (3) 그 하나의 내러티브를

하나의 line이라고 잡으면 그 line 주변으로 갖가지의 상황과 인물과 이미지들이 때로는 평행하게 때로는 교차하며 지나간다는 것이다.

근데 그 'line'이 하나가 아니라 2-4개 정도 되니까 문젠데 어느 'line'을 중심으로 잡고 주변들을 통합시켜 나갈지에 따라 각자의 논리와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다. 암튼... 위와 같은 3가지 원칙을 어느 정도 지켜주고 있기에 우리가 린치 감독의 말도 안되는 비논리의 영화를

보고 나서도 '아.. 그래도 뭘 얘기하려는지는 알 것 같애'라던가 '아.. 그게.. 그건가?'와 같은 느낌을 받거나 그의 영화를 매력적이라고

느끼게 되는 이유인 것 같다.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영화들을 만들면서도 그가 미국 내에서 대중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감독들 중 하나

라는 사실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다.

 

P.S. 이 영화가 현재 서울에서 명보극장 하고 씨네큐브 두 군데에서만 상영하는데 오늘 낮 1시에 명보 극장에서 아내와 단둘이 이 영화

를 보는데 정말이지 관객이 우리 둘밖에 없었다는.. 관객 거의 없는 극장에서 영화를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정말 이렇게 딱 우리만 있는

텅빈 극장에서 본 적은 처음이어서 좀 민망하기도 했다. 근데 다른 영화도 아닌 이 영화를 이런 분위기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는 건 정말

뜻밖의 행운인 것 같다. 어두 컴컴하고 아무도 없는 텅빈 객석.. 옆으로 검은 벨벳이 드리워진.. 참으로 '데이빗 린치적인 공간'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영화의 후반부에 텅빈 극장에서 로라 던(니키)이 자신(수잔)이 찍은 영화의 장면 - 그 장면은 실제 지나간, 우리가 본

영화의 장면이기도 하다 - 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각이 내 시각과 일치하면서 나 역시 텅빈 극장에서 이걸 보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로라 던과 내가 일체가 돼버리는 느낌까지 받을 수 있었다. 다른 관객들이 있는 극장이었다면 이런 느낌까지는 못받았을 거라고 생각

하면 뜻밖의 행운이었다!!

 

2007/08/03 (금) 0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