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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Krush [Butterfly Effect] (2015, Es.U.Es/Vinyl-Digital)

tunikut 2016. 6. 26. 12:32


디제이 크러쉬의 11년만의 신보. 나온지는 뭐 한참 됐지만 당최 아무도 리뷰를 안하길래 디제이 크러쉬의 오랜 오랜 오랜 오랜 팬인 (나 크러쉬 싸인도 받고 악수도 한 사이) 내가 또 한번 다뤄줘야겠다는 생각에 이 앨범을 그랩했다. 디제이 샤도우 신보가 막 발매됐는데 그와 함께 90년대말 인스트루멘탈 힙합계의 쌍벽을 이뤘던 크러쉬 아니겠음?


디제이 크러쉬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바를 썰을 풀자면 뭐 거의 책을 써야 될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이 기형적으로 많지만, 그냥 간략하게 얘기해보자면 그는 이 바닥에 있어 '선구자'다. 랩이 없이 비트만으로 이뤄진 힙합 앨범을 만든 선구자라는 얘기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후배 재즈 뮤지션들에게 우리 모두는 듀크 엘링턴에게 엎드려 절해야 한다고 한 뉘앙스 그대로, 오늘날 인스트루멘탈 힙합을 하는 아티스트들은 모두 디제이 크러쉬에게 엎드려 절해야 한다는 얘기다. 심지어 동시대 같이 쌍벽을 이루던 디제이 샤도우도 (아주 약간은) 디제이 크러쉬의 영향 아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샤도우는 샘플만을 100% 이용해서 하나의 인스트루멘탈 힙합 앨범을 만든 또 다른 의미의 선구자적 위치에 있으므로 솔직히 이 둘은 동급이다.)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솔직한 내 심정을 얘기해볼까? 그래 뭐 이 페이지는 tunikut's PREJUDICE니깐. 돌 맞기는 싫지만 난 솔직히 이 바닥에서 까방권을 가진 제이 딜라 보다도 디제이 크러쉬가 더 잘한다(잘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디제이 크러쉬를 유난히 격하게 아끼는 이유는 90년대 중반부터 그의 음악을 꾸준히 들어왔지만, 항상 내가 그 시기에 원하던 방향의 음악을 마치 그에 상응하듯이 들려줬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 피트락과 프리모에 경도됐던 시기에 정말 대갈통 쿵쿵 찍는 재즈가 가미된 힙합 비트를 듣고 싶던 나에게 only the strong survive라는 곡을 선사해줬으며, 90년대 후반 포티스헤드와 매시브 어택 등을 듣던 시기에 몽환적인 브레익비트에 여자 보컬이 듣고 싶었던 내게 skin against skin라는 곡을 들려줬고, 2000년대 이르러 아방가르드에 빠져들던 나에게 the message at the depth라는 앨범을 들려줬다. (여담으로, 예전에 한번 리뷰한 적이 있지만 여전히 내가 꼽는 크러쉬 최고의 앨범은 strictly turntablized다.) 아니 뭐 이런 걸 다 떠나서도 곡 하나하나 마다 느껴지는 그 비트들의 '결'이랄까, 그 질감'이.. 예술이다. 말그대로, 예술.


암튼 또 잡담만 졸라 하게 됐는데 미안하고, 이번 앨범은 솔직히 말해 앨범 타이틀이나 자켓, 컨셉 등만 놓고 보면 조금 실망스러울 정도고, 뭐 아직도 퓨쳐 타령이냐 뭐 이런 느낌에 바이닐 디지털에서 독점 판매한 바이닐 패키지가 너무 구려서 또 한번 실망했지만, 정작 그 안에 들어있는 음악들은 정말 숨못쉬게 좋아서 다 용서되는 느낌이랄까. 음악적으로 놓고 봤을 때 이 앨범의 유일한 단점은 너무 다양한 스타일들을 한 앨범 안에서 들려줬다는 거고, 이는 필시 크러쉬 형아가 오랜만에 내는 신보라 (언제 또 낼지 모른다는 조바심에) 관심 있는 스타일을 한꺼번에 다 구겨 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뭐 욕심을 부렸다는 얘기지.


jaku 앨범에서부터 그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 monthly single series에서 제대로 보여줬던 크러쉬의 현악음이 가미된 오케스트레이션과 스코어 음악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이 앨범의 nostalgia나 future correction 과 같은 트랙들에서 현저하고 (nostalgia 같은 경우 아예 일본 현대음악/영화음악 작곡가인 니가키 다까시라는 분을 초청해서 피아노 연주를 맡기기도 함), missing link에서는 록적인 느낌을 냈고, skin against skin이나 final home 같이 여성 보컬이 가미된 트립합적인 걸 좋아하는 팬들을 위해 my light를 실었으며, 나처럼 약간 노이지한 느낌의 앱스트랙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strange light이나 everything and nothing 같은 트랙도 있다. (특히 디바인 스타일러가 빡쎈 라이밍을 들려주는 everything and nothing 같은 곡은 정말 미친개쌍욕나올 정도로 좋으니 필시 체크해보길) 한편 크러쉬는 이제 힙합 버리고 일렉트로닉으로 가는거임? 이라는 세간의 우려에 부합하는 probability나 conruscation 같이 앰비언트적 느낌 충만한 곡들도 또 한 포션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한 앨범에 원체 다양한 스타일을 실었는데 그 스타일들이 뭐 새롭게 크러쉬가 시도해서 병맛이 됐다는 게 아니고 그 동안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통틀어서 쭉 들려줬던 걸 한데 모은 느낌이라고 보면 되는데, 헤테로적인 것 말고 호모적인 걸 좋아하는 팬이라면 좀 이 앨범에 우려를 표할 수도 있겠으나, 이 앨범이 놀라운 것은 곡 하나하나의 퀄리티가 워낙에 지나칠 정도로 높아, 통일감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마저도 덮어버리기에 충분하다는 거다. 디제이 크러쉬가 들려주는 비트들의 그 '질감'은 여전히 죽지 않았다. 왜 그를 가리켜 '비트 마에스트로'라 부르는지 이 앨범을 통해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