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nikut's Cultural Parad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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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t Baker [Chet Baker Sings] (1956, Pacific Jazz)

tunikut 2010. 10. 12. 12:50

  전 재즈를 들을 때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클래식처럼 재즈도 이미 지나가버린 옛날의 장르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죠. 오늘날 많은 이들은 클래식을 연주하지만 절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를 능가하는 음악가가 나타나지 않듯이 역시 재즈도 오늘날 살아숨쉬고 있는 장르라고 생각하지만, 다들 그렇게 믿고 있지만, 절대 찰리 파커와 버드 파웰을 능가하는 연주자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무섭기까지 합니다. 과연 오늘날의 재즈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정말로, 인정하긴 싫지만 마일즈 데이비스 사후로 더이상의 진화는 없는 것일까요. (시작부터 궤변을 늘어놓아 죄송합니다.)




  

01. That Old Feeling

02. It's Always You

03. Like Someone In Love

04. My Ideal

05. I've Never Been In Love Before

06. My Buddy

07. But Not For Me

08. Time After Time

09. I Get Along Without You Very Well

10. My Funny Valentine

11. There Will Never Be Another You

12. The Thrill Is Gone

13. I Fall In Love Too Easily

14. Look For The Silver Lining

 

  

  혹시 쳇 베이커가 노래 부르는 걸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쳇 베이커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웨스트코스트 쿨재즈의 아이콘으로 불리우던, 흑인들이 장악하던 재즈씬에서 백인들의 자존심으로 불리우던 인물이었죠. 그를 두고 '트럼펫도 연주하는 보컬리스트'라고 불러야할지, '노래도 부르는 트럼펫터'라고 불러야할지 고민이 됐다고 하는데요.. "쳇 베이커의 우수에 찬 감수성 깊은 목소리", "재즈 보컬의 걸작" 뭐 이런 식으로 많은 매체에서 그와 그의 앨범을 칭송하고 있지만 정작 제대로 그의 보컬곡을 들어본다면 사실은 그의 목소리와 음악은 굉장히 어떻게 보면 절대 전형적이지 않고 '이질적'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글쎄요.. 제가 워낙 밥재즈 위주로 음악을 들어오다 보니 이 앨범이 '이질적'으로 들리게 된 이유도 있을 것 같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컬은 충분히 여타 재즈 보컬리스트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습니다. 기교도 거의 없고 재즈 보컬이라면 흔히 듣는 비브라토도 거의 없이, 어찌 들으면 그냥 콩쿨대회에 나온 왠 말끔한 청년이 뒷짐지고 담담하게 부르는 듯 그의 목소리는 쉽고 매끄러우며 불안합니다. 또 그의 연주는 어떻게요. 그의 목소리와 사이 좋게 그의 트럼펫 역시 굉장히 부드럽고 고요하고 위태위태하게 연주됩니다. 요는, 이 쳇 베이커라고 하는 뮤지션의 음악은 절대 '기교'라는 것과는 매우 매우 거리가 멀었다는 얘기지요.

 

  그런 의미에서 쳇 베이커라는 인물은 재즈 역사에서 매우 특이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은 반면에, 그를 낮게 평가하는 시선도 많은 게 사실이죠. 대부분의 그 이유는 아마도 그의 '음악성'이나 '실력'이나 '테크닉'에 기반한 게 아닐까 싶어요. 일반적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쳇 베이커는 화려한 트럼펫 솔로를 들려줬거나 여러 명곡들을 작곡했던 뮤지션이라고 할 수 없었던 게 사실이구요. (물론 쳇 베이커는 비밥을 연주하기도 했고 몇몇 곡들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어쩌면 재즈 역사에서 그가 상대적으로 underrated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이 앨범은 너무나 유명한 앨범입니다. 쳇 베이커의 앨범 중 하나를 꼽으라면 주로 이걸 꼽죠. 전 이 앨범을 들을 때마다 놀라고 또 놀라는데 그 이유는 이 앨범에 담겨 있는 그 형용할 수 없는 '감수성' 때문입니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Kind Of Blue"를 통해 코드 위주가 아닌 '모드' 주법을 제시하며 음악에 담긴 '감성'에 보다 주력을 했다고는 하지만 이 앨범은 그런 차원이 아닌, 어쩌면 '연주'가 중요시 되던 1950년대 재즈씬에서 완벽하게 이를 무시한 '감성' 앨범이었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반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거죠. 실제로도 이 앨범 발매 후 전통적인 재즈팬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고 합니다. 이 앨범에는 화려한 연주가 없습니다. 화려한 노래도 없습니다. 어찌 들으면 그냥 편안한 이지리스닝 음악 같다는 느낌도 들 정도죠. 하지만 이 가운데 은근하게 베어나오는 소리들은, 그 어떤 재즈 앨범에서도 쉽게 느낄 수 없었던 깊게 깔린 허무와 슬픔의 정서를 들려줍니다. 근데 그 정서라는 것이, 듣는이의 심금을 울린다거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드는 게 아니고 맑은 하늘과 맑은 시냇물과 시원한 바람을 마주한 편안한 상태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슬픔이라는 거죠. 영화 "박하사탕"의 끝장면을 떠올려보시면 비슷한 느낌일 것 같네요. 실제로 앨범을 들어보면 그다지 어둡다거나 우울하지는 않죠. 곡들은 살랑거리고 따뜻하며 우아합니다. 쳇 베이커의 목소리는 부담없이 친근하고 편안하며 그의 트럼펫 소리도 매우 감미롭습니다. 트럼펫을 빵빵~거리는 시끄러운 악기로만 아신다면 그의 연주를 꼭 들어보시길 권유합니다. 앨범의 대표곡이면서 역사상 최고의 버젼으로 꼽히는 "My Funny Valentine"은 의외로 앨범 내에서 유일하게 쳇 베이커가 정색하고 진지하게 부르는 곡으로 앨범 내에서도 '튀는' 곡이지만 대다수의 곡들은 익숙한 스탠더드의 편안한 버젼들입니다. 루이 암스트롱이 부르는 "That Old Feeling" "But Not For Me"가 흑인 땀냄새 물씬 풍기는 열사우나같은 느낌이라면 쳇 베이커가 부르는 같은 곡들은 상쾌한 허브 스파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한번도 사랑을 해본 적 없는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의 테마로 사용하면 좋을 법할 "I've Never Been In Love Before" 같은 곡들은 박찬욱 감독의 "박쥐"에서 송강호씨가 김옥빈씨를 만나기 전에 밤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울려퍼졌다면 영화가 좀더 멋들어졌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요점이 좀 불분명해졌는데.. 요는 '감수성'이라는 겁니다. '연주'라는 것이 중심이 되던 재즈의 무림 세계에서, 자신의 비참한 삶과 감정을 그 자체 그대로 음악에 투영시켜버린 쳇 베이커. 가창력이나 실력에 대해 비평가들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한 쳇 베이커. 어쩌면 그 자신조차 재즈 뮤지션으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느끼지 못했을 쳇 베이커. 하지만 오늘날까지 어떤 재즈 뮤지션도 들려줄 수 없었던 '감성의 재즈'를 들려준 그를 이 가을 다시 한번 기억해 봅시다.

 

 

* 오리지날리 포스티드 온: http://blog.naver.com/blogmiller/1100950077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