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편 하우스 음악은 이비자(Ibiza)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비자는 히피들과 부자들이 머물러가는 장소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80년대 중반 즈음, 발레아레스 스타일의(Balearic)의 하우스 믹스가 이비자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DJ Alfredo가 있었던 Amnesia와 같은 클럽에서는 록, 팝, 디스코, 하우스 음악을 믹스하여 플레이했다. 이 지역만의 독특한 사운드 스타일과 엑스터시의 힘을 빌은 이비자의 클럽들은 영국의 클럽씬에도 영향을 미쳤다. 1987년 경 Paul Oakenfold와 Danny Rampling은 런던 사우스 워크의 Shoom, Heaven(여기 문 앞까지만 가봤음 --; – 역자주), Future, 그리고 버밍엄의 Purple Raines Spectrum과 같은 영국의 클럽들에 이러한 이비자 사운드를 소개했다. 하지만 “Summer of Love” 자체는 아직 완벽한 것이 아니어서 약간의 미국적인 훌레이바가 더 첨가되어야 했다.
한편 미국의 하우스 음악은 보다 정교하고 세련돼지기 시작해서 단순한 드럼 루프와 샘플링 이상의 사운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뉴욕의 Mateo & Matos나 Blaze와 같은 아티스트들이 만든 디스코 하우스 크로스오버 트랙들이 그러했다. 또한 시카고에서는 Marshall Jefferson이 하우스 ‘수퍼 그룹’인 Ten City를 결성하여 “That’s The Way Love Is”를 히트시켰다. 디트로이트에서는 테크노라 불리우는 음악이 발전하기 시작하여, Juan Atkins, Derrick May, Kevin Saunderson과 같은 걸출한 아티스트들이 나타났다. Atkins는 이미 1982년에 Cybotron 프로젝트로 활동했고 1985년에 Model 500의 이름으로 히트 싱글인 “No UFOs”를 발표했고 이어서 Transmat, Metroplex, Fragile과 같은 레이블에서 여러 싱글들을 발표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독창적인 싱글은 Derrick May의 “Strings Of Life”였는데 그는 스스로 이것을 일컬어 “George Clinton과 Kraftwerk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잼을 하는 사운드”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이 곡은 기존의 하우스 음악보다 어둡고 보다 인텔렉츄얼한 느낌을 주었다. 1984년에 Knights of The Turntable은 Cybotron의 곡들과 유사한 “Techno-Scratch”라는 곡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 ‘테크노’라는 명칭의 시작으로 보고 있으나 사실 원조는 Atkins가 1984년 발표한 히트 싱글 “Techno City”에 있다. 이것은 Alvin Toffler의 저서 “Future Shock”에 있었던 “techno rebels”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러한 레코드들은 메이져 음반사들로부터 독립돼 있었고 이러한 곡들이 플레이되는 파티에서는 커머셜한 음악은 틀지 않았다.
이러한 미국의 하우스와 테크노가 컴비네이션되어 영국으로 건너와 영국 하우스씬에 영향을 미쳐서 Hacienda와 같은 클럽에서는 1988년 7월부터 매주 수요일 “Hot”이라는 이름으로 ‘하우스 스페셜 나이트’식의 이벤트를 열어 2,500명의 청중들이 이비자씬을 흉내낸 영국 음악을 즐겼는데 대표적으로 클래식인 A Guy Called Gerald의 “Voodoo Ray”와 같은 곡은 아예 Hacienda와 Madchester 사운드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라고 볼 수 있다. Factory Records의 사장이었던 Tony Wilson은 그의 텔레비전 쇼에서 애시드 하우스 컬쳐를 소개하기도 했다. 또 미들랜드 지역에서도 80년대 후반의 하우스씬을 포용하여 다층식의 자동차 공원을 이용한 언더그라운드씬이나 보다 버밍엄의 Digbeth Institute(원래 Sundissential이었고 지금은 ‘Sanctuary’가 됨)같은 합법적인 댄스 스테이션도 생겼다.
Developments in the United States in late 1980s to early 1990s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 하우스 씬은 여전히 시카고, 디트로이트, 그리고 뉴욕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클럽 수준이었고 그 중 역시 Paradise Garage가 가장 인기가 높았다. 당시 Todd Terry가 커버한 Class Action의 “Weekend (Larry Levan mix)”는 퀵한 느낌의 샘플링과 보다 거친 베이스를 사용하여 언더그라운드 디스코로부터 힙합의 영향을 받은 하우스로의 연속성을 증명해보였다. 힙합 음악은 단독적으로 라디오에서 인기를 끌던 시기였으며 그밖에 록, 컨트리/웨스턴, 혹은 알앤비 음악의 영향도 있었다. 당시에 또 주목할 만한 뉴욕의 프로듀서/디제이들로는 Bobby Konders, Tommy Musto, Frankie Bones 등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 80년대에 이미 국제적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어서 사실 영국의 초창기 XL Recordings의 곡들은 대부분 이 사람들의 싱글들이다.
뉴욕 사운드에 영향을 미친 음악들로는 힙합, 레게, 라틴 음악 등인데 이 시기에 처음으로 Erick Morillo, Roger Sanchez, Junior Sanchez, Danny Tenaglia, 그리고 Jonathan Peters 등과 같은 뉴욕의 수퍼 프로듀서/디제이들의 이름이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모두 tribal house, progressive house, funky house 등의 이름으로 다른 장르들로부터 진화한 형태의 하우스 음악을 들려줬다. Masters At Work나 Kerri Chandler와 같은 프로듀서들은 재즈나 힙합, 그리고 다운비트 등의 요소를 통해 보다 풍부한 질감의 가라지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가스펠/알앤비의 영향을 받은 Aly-us는 1993년에 Strictly Rhythm에서 “Time Passes on”을 발표하고 이어서 “Follow Me”를 발매했는데 이 싱글은 라디오나 클럽에서 모두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Cajmere의 “Time For The Perculator” 역시 라디오에서 많이 틀어졌는데 이것은 게토하우스라는 서브 장르의 초기 형태가 되었다.
Cajmere는 90년대 초반에 다시금 시카고 하우스의 부활을 알리는 재생력을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80년대 시카고 세대들은 열악한 계약 조건, 뉴욕이나 유럽으로의 이주 등으로 인해 자멸한 상태였으나 Cajmere가 Cajual이나 Relief와 같은 레이블을 만들면서 그 음악적 스타일과는 상관없이 시카고 하우스씬을 되살렸다. 결국 90년대 초반 무렵 Cajmere(뮤지션명으로 Green Velvet, 프로듀서명으로 Dajae 등으로도 유명), DJ Sneak, Glenn Underground 등은 무서운 속도로 후레쉬한 레코드들을 발매하기에 이른다. 또한 최근에 다시 리이슈된 레이블인 Dance Mania 소속의 DJ Rush, Robert Armani, 그리고 그의 사촌인 Paul Johnson 등도 레코딩 작업을 했고 유럽에서는 디제이로서 활약을 했다. Derrick Carter 역시 이 시기에 매우 존경받는 하우스 프로듀서/디제이로 등장했다.
디트로이트는 대부분 테크노로 유명했고 테크노와 하우스 사이의 경계는 아주 미약하여 430 West, KMS, 그리고 Serious Grooves 등과 같은,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레이블에서 Kevin Saunderson, Marc Kinchen, Octave one (그밖에 시카고에서 이주해 와서 정기적으로 Detroit 레이블을 통해 싱글을 발매한 Chez Damier & Ron Trent도 있다.) 등의 아티스트들이 음악 활동을 했다. 또한 이 시기에 Underground Resistance는 펌핑하는 피아노 사운드와 보컬이 첨가된 가라지 트랙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에 시카고, 디트로이트, 뉴욕과는 별도로 로스 앤젤레스 지역에서도 댄스 뮤직이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Hardkiss나 영국 출신의 DIY나 Charles Webster 등에 의해 파티가 주도되기도 했다. 이윽고 보스턴, 프로비덴스,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워싱턴 DC 등에서도 하우스 클럽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After the “Summer of Love”: early 1990s to mid 1990s

영국에서는 이 장르에 있어서 보다 확장된 실험들이 강행되었고 이는 새로운 신인들의 출현을 의미했다.
Lakota, Miss Moneypenny’s, 그리고 오리지널 C.R.E.A.M. 등과 같은 하우스/레이브 클럽등이 영국에 출현하여 사람들을 위해 다른 곳에서는 듣고 싶어도 못들을 하우스/댄스 뮤직 이벤트들을 열었다.
The KLF의 “Chill Out”과 같은 앰비언트 하우스 앨범이 발매된 이후로 영국에서는 ‘chilling out’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 앨범은 대부분의 트랙들에서 퍼커션 사운드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하우스는 아니다. 또 다른 예로 Aphex Twin의 “Analogue BubbleBath” 같은 곡도 있다. 사실 Chill Out 일렉트로닉 뮤직은 종종 앰비언트, 다운 템포(나중에), 혹은 뉴 에이지(예전에) 등 완전히 다른 장르로 정의되기도 한다. 칠 아웃 일렉트로니카의 독특한 특징은 다른 스타일의 댄스 뮤직과 달리 퍼커션을 이용한 노이지한 질감보다 통합적이고 길게 내려앉는 톤을 중요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여러 칠 아웃 컴필레이션 앨범들이 발매되었다.
이와 동시에, 다양한 형태의 인디 댄스 씬이 형성되며 Happy Mondays, The Shamen, New Order, Meat Beat Manifesto, Renegade Soundwave, EMF, The Grid, The Beloved 등 여러 밴드들이 생겨났다. 뉴욕에서는 Deee-Lite가 나타나 하우스 음악에 다국적/다시대적인 문화 요소를 가미했다. 이 시기에 눈여겨볼 만 했던 두 개의 싱글이 있는데 하나는 Orb의 “Little Fluffy Clouds” (Rickie Lee Jones의 특색 있는 보컬 샘플이 인상적)이고 또 하나는 Happy Mondays의 “Wrote For Luck (W.F.L.)”이다. 이 두 트랙 모두 후에 Paul Oakenfold에 의해 클럽 히트가 됐다.
1994년에 범죄에 대한 입법이 개정되면서 영국 정부는 “반복적인 비트를 사용하는 음악”이 연주되는 큰 행사를 금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대 시위가 여러 군데에서 일어나다. 비록 1994년 11월에 이 법률이 통과됐지만 사실 그 영향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음악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변화했으며 Leftfield의 “Release The Pressure”와 같은 곡을 보면 하우스 사운드에 덥과 레게를 도입한 것을 알 수 있다. 보다 커머셜한 씬에서는 알앤비를 스트롱한 베이스 플레이버에 믹스시킨 튠들이 유행하였다.
하우스 음악은 점차 약물 및 이 씬에 속한 복합적인 문화적, 인종적 요소로 인해 변형되어 갔다. Kicks Like A Mule의 “The Bouncer”를 들어보면 힙합의 브레익비트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고 SL2의 “On A Ragga Trip”을 보면 드럼 앤 베이스와 정글에 대한 기초를 엿볼 수 있다.
초기에 브레익비트 하드코어라고 불리우던 음악들도 런던의 Rage와 같은 클럽에서 “inner city” music이라 불리며 인기를 끌었다. Moving Shadow나 Reinforced 등의 레이블들이 언더그라운드 씬의 인기 레이블이 되었다. 그 중에 하나, Moonshine 레이블에서는 “140 BPM: The Speed Limit”이라는 인상적인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매했는데 이 음반을 들어보면 ‘London Hardcore Techno’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Goldie의 “Terminator” 같은 곡을 들어보면 160 bpm을 웃도는 비트를 보여주며 댄스 뮤직이 하우스로부터 보다 헤비하고, 빠르며, 복합된 베이스라인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이게 바로 드럼 앤 베이스의 출현이다. (Goldie의 데뷔 앨범인 “Timeless”에 수록된 22분의 대작 “Inner City Life”를 들어보라)
그 이후에 UK Garage가 등장했다. 드럼 앤 베이스를 추구하던 언더그라운드 씬으로부터 성장한 이 음악은 리스닝보다 댄싱 자체에 목적을 둔 측면이 강했다. 1997년에 Ripgroove의 “Double 99”와 같은 주목할 만한 싱글이 발표되기도 했는데 이 음악은 주로 이비자의 클럽에서 인기를 끌었고 보다 소프트해진 형태로 영국으로 재수입되기도 했다. 이 음악은 곧 Liberty X나 Victoria Beckham과 같은 아티스트들에 의해 메인스트림에서도 적용이 됐다.
4 Hero는 야수적인 브레익비트에서 벗어나 반대로 보다 소울/재즈적인 접근을 시도했고 때로는 정교한 사운드를 위해 오케스트라 섹션을 도입하기도 했다. 나중에 이 스타일은 Brokenbeat 혹은 Breakbeat로 알려진 서부 런던 씬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 스타일 역시 엄격하게는 하우스는 아니지만 다른 여타 일렉트로닉 음악과 마찬가지로 오버랩되는 경향이 있다.
3편에 계속…
* 이 글은 wikipedia.org에 실린 내용을 번역한 것입니다.
2006/07/20 (목) 1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