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es
간만에
tunikut
2008. 12. 26. 15:54
1. 내 생각도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지만 극단적인 말을 하는 뮤지션들이 있다. 피타입이 "힙합을 버린다"는 표현을
해서 논란이 많고 거슬러 올라가면 각나그네가 수퍼맨 아이비로 바꾸면서 이전의 각나그네는 모두 잊고 버려달라
는 뜻을 비춘 적도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개인적으로 정말 작은 그릇을 가진 뮤지션이라고 생각하는 모 흑인음악
뮤지션이 있는데 그 분 옆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켜봐온 결과 정말 인간이 저러면 안된다는 결론을 내린 분도 있다.
2. 나 역시 장르 구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꽤 오래전부터 음악은 장르를 구분하고 올바로 장르적 성격을 인식해서
감상해야 된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별로 변함이 없다. 그러나 예전에 내 생각엔 장르간에 우월함
을 따졌었고 지금은 모든 장르가 나름대로의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서 장르를 '구분은 하나 차별은 하지
않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 블로그에서 자주 언급되던 - 나의 리스닝 스승 - 예전에 친하던 어떤 형한테 내가 이제 앞
으로는 힙합하고 일렉트로닉만 들을 거예요라고 했다가 "야, 그러면 안돼.."라는 짤막한 한마디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꾼
적이 있다.
3. 힙합. 힙합이 뭘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대한민국 리스너들 사이에 존재하는 힙합은 '음악 장르' 중 하나다. 물론
힙합은 단순한 음악 장르는 아니다. 길거리로 나온 흑인들의 표현 수단이 힙합이었고 그 표현을 하다보니 저절로 특유의
문화적 특성과 생활 방식, 애티튜드 등이 자리잡게 된 거다. 흑인들 이외의 인종들은 온전한 형태의 힙합을 경험하거나
인식할 수 없다. 그저 그 문화적 특성과 멋스러움을 공유하거나 향유하는 것일 뿐. 그래서 결국 미국의 아프로-어메리칸
이외의 사람들이 힙합을 '생활 방식', '애티튜드'라고 정의하는 건 굉장한 넌센스다. 그럼 아프로-어메리칸 이외의 사람
들은 힙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대부분은 힙합이라는 문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차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즉, 어떤
이들은 이렇게, 어떤 이들은 저렇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거다. 예를 들자. 미국/유럽에는 여러 클러버들이 있다. 그러니까
일렉트로니카/댄스 뮤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고 우리나라에도 물론 소수지만 그런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힙합을 어떻게
생각할까? 대다수는 '댄스 뮤직의 하위 장르'라고 생각한다. 즉, 하우스-트랜스-칠아웃-앰비언트-테크노 등등과 동격에
있는.. 특유의 브레익비트를 기반으로 샘플링과 스크래칭이 가미될 수도 있는 그런 특징적인 비트와 사운드를 가진 음악.
그게 힙합이다. 따라서 이 사람들한테는 Rakim이나 DJ Krush나 Massive Attack이나 Roni Size나 Wagon Christ를 들으면
그게 당연히 힙합인 거다. Nujabes의 아름다운 인스트루멘틀이나 Necro의 하드고어한 음악들 모두.. 당연히 '힙합'이다.
4. 그렇다면 이제 현실에 좀더 가까이 접근해보자. 우리에게 제일 가까운 건? 바로 인터넷 힙합 커뮤니티겠지. 이 커뮤니티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힙합 CD를 사서 듣는 대다수의 '우리나라 힙합 리스너'들에게 힙합은 '음악'일 뿐이다. 물론 본토의
힙합에는 4요소가 있다. 근데 과연 이 4요소가 우리나라에서 온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숨쉬고 있나? 전혀 그렇지 않다.
따로 논다. 비보잉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만 하고 그것만 즐기는 향유층이 따로 있다. 그래피티도 마찬가지. 힙플이나 리드머
에서 비보잉과 그래피티에 대한 논의나 활발한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나? 그럼, '우리들'에게 힙합은 4요소 중 그저 2가지인
엠씨잉과 디제잉만이 주 대화대상 아닌가? 결국 '우리들'한테 힙합은 '음악' 아닌가? 근데 뭐가 애티튜드고 삶의 방식이라
는 건지 궁금하다.
5. 피타입은 힙합이 '폭력적인 잡종문화'라고 했다. 난 이 말을 듣고 정말 정말 그에게 큰 실망을 했는데 아니 어떻게 생각
하면 좀 신기하기도 했다. 정말 힙합을 저렇게 생각하고 그 동안 음악을 해왔다는 말인가? 물론 피타입이 생각하는 힙합이
뭘 말하려고 하는지는 안다. 소위 본토 힙합에서 말하는 '랩게임'이라는 거겠지. 힙합이라는 문화는 태생부터 '경쟁'의 측면
이 존재했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힙합에는 '배틀'이라는 게 반드시 있지 않나? 4요소 모두 해당된다. 엠씨잉? 후리스타일
배틀이 있고 - 영화 8마일을 보자 - 디제잉? 역시 해마다 디제이 배틀과 챔피언쉽 컴피티션이 열린다. 비보잉도 배틀이 있지.
그래피티도 마찬가지고. 이건 힙합만이 가지는 굉장히 독특한 문화다. 그렇지만 이게 힙합의 '전부'일 수는 없다. 절대 절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스킬을 연마하고.. 아마도 피타입이 1집에서 그렇게 강조하던
'힙합다운 힙합'은 이런 거였나보다. 아.. 그랬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호전적인 태도를 취했었고 라임과 스킬의 방법론을
강조했던 거였나? 하하.. 거참. 이거 어떻게 보면 영화 말미에 엄청난 '반전' 같다. 아니 그렇다면 Common의 지적인 가사와
Nujabes의 아름다운 선율과 Madlib의 재즈 리바이벌과 Pharcyde의 재기발랄한 가사들은 뭐가 되고 그걸 들으면서 즐거
워했던 우리들은 뭐가 되는 거지? 어쩌면 저렇게 힙합에 대해서 편협한 인식을 했었는지..
6. 제발 제발 제발 부탁인데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지 말자. 제일 치사하고 안돼보이고 그릇이 작아보이는 게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는 거다. 그러면서 현재의 나는 다르고 미래의 나는 달라질 것이라고? 그렇지 않다. 과거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고 그 주변 사람들에게 똑똑히 남아 있다. 물론 과거의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인식하고 반성하거나 참회하거나 할 수 있고
또 필요하다. 그렇지만 완전히 부정을 하고 '아 사실은 원래의 나는 그게 아니었어'식의 태도는 아니올시다다. 헤비메탈과
엑스 재팬에 열광하다가 모던록에 심취하고 힙합으로 바꾸면서 백인 음악에 대한 노골적인 안티를 취하면서 소울과 훵크에
집중하다가 다시금 레게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이젠 레드 제플린을 존경한다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당신 말이야 당신.
2008/12/14 (일) 22:09